著者
呉 永台
出版者
東京大学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地域文化研究専攻
雑誌
年報地域文化研究 = The Komaba journal of area studies, the University of Tokyo (ISSN:13439103)
巻号頁・発行日
no.23, pp.1-20, 2020-03-31

본고에서는 막말기 히고(肥後)의 정치동향을 분큐(文久) 1 년(1861) 12 월부터 동 3 년 4 월까지로 한정하여 존왕양이론의 고양과 번정부의 〈번시(藩是)〉 확정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 막말기에 제번의 정치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분큐기 이후였다 . 중앙정치에서 발언권을 높여 나간 초슈(長州)와 사츠마(薩摩)를 비롯한 제번과 마찬가지로 히고가 중앙정국에 뛰어든 것 도 이 시기였다 . 당시 각 번은 중앙정국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과정에서 번의 정치방침을 거번일 치 하에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 히고의 경우 분큐 2 년 4 월에 〈번시〉가 결정됨으로써 막말기 정 치운동의 초기조건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 번시라는 개념의 정의를 둘러싸고 학계에 일치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 본고에서는 막말 정치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염두에 두고 , 〈번시〉란 〈전국정치와 자번(自藩)과의 관계를 표명 한 정치방침〉이라고 정의했다 . 일본의 정치질서가 붕괴하는 가운데 각 번 내에서 정쟁이 발생 하자 번정부는 이를 수습하고 단결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자번의 정치적 역량을 고려하여 전 국정치의 바람직한 모습을 설정해 가신들에게 제시했다. 실제로 막말기에 다수의 번에서 〈번시〉 가 제정되었다 . 본고의 제 1 장에서는 히고의 정치상황을 번정부와 근왕당의 대립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 근왕당이 번정부에 제출한 건백서에는 근왕운동의 당위성과 군사 동원 등 번 차원의 참여를 요 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 이는 번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기에 충분했고 , 번정부로 하여 금 중앙정치에 대한 입장표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 제 2 장에서는 번정부가 근왕당의 정치적 요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면서 , 번주 주도 하에 〈번시〉가 확정되기까지의 일련의 정치 과정을 분석했다 . 본고에서 특히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분큐 2 년 4 월에 확정된 〈번시〉의 내용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이다 . 히고번정부는 〈번시〉에 '천조 , 공의에 대한 충절(天朝公義え之御忠節)' 을 명 시했다 . 천황(조정)을 천조로 명명하여 일본의 상징적 통합의 축으로 받들고 , 쇼군(막부)을 공의 즉 일본정치의 최고결정권자로 인정했다 . 쇼군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 다고 규정한 것이다 . 이것은 근왕당이 쇼군과 다이묘의 주종관계를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 상대 화한 것과 상반되는 견해였고 , 여기에는 쇼군으로부터 대대로 은혜를 입고 있다는 자기인식이 막말기 히고의 〈번시〉 확립과 그 의미투영되어 있었다 . 특히 천조와 공의를 함께 충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은 막말기 히고의 정 치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 히고의 〈번시〉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타번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 본고에 서는 초슈의 '조정에 충절 , 막부에 신의 , 조종에 효도(朝廷へ忠節、幕府へ信義、祖宗へ孝道), 인슈(因州)의 '황조 , 막부 및 조종에 충효(皇朝幕府及祖宗ヱ忠孝)' 를 들어 각각에 쓰인 용어 와 그 함의를 고찰했다 . 본고에서는 위의 논의를 토대로 향후 과제를 두 가지 제시했다 . 첫째는 막말기 히고의 구체적인 정치동향을 〈번시〉와 관련지어 고찰해 나가는 것이다 . 공무 대립과 대외정책상의 정쟁 등 혼란하고 복잡한 중앙정국에 대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번시〉가 어떠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는지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둘째는 히고의 사례를 다른 번과 비교하는 것이다. 각 번에서 〈번시〉가 어떻게 확정되었고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 그것이 각각의 번이 전개한 정치운동에 어떠한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져 왔는지 막말유신기의 정치변혁이라는 큰 틀 안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 특히 막부에 대한 인식 의 변화가 각 번의 정치운동에 어떠한 다양성을 초래했고 , 그것이 왕정복고에 어떠한 영향을 미 치게 되었는지 해명하는 작업은 , 해당 시기의 정치과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 여러 번들을 폭넓게 비교 , 분석해 나가는 방법을 통해 기존의 특정 번 중심의 역사상을 극 복하고 , 보다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시각에서 막말정치사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
著者
波多野 瞭
出版者
東京大学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地域文化研究専攻
雑誌
年報地域文化研究 = The Komaba journal of area studies, the University of Tokyo (ISSN:13439103)
巻号頁・発行日
no.23, pp.54-69, 2020-03-31

Les bienheureux sentent-ils, en raison de leur bonté, une compassion envers les condamnés subissant le supplice imposé par Dieu ? Cet article examine la tradition médiévale de cette question, en s'employant à situer la position particulière de Thomas d'Aquin et à examiner quelques problèmes immanents à son écrit. C'est l'homélie évangélique de Grégoire le Grand, qui jette une base conceptuelle pour la discussion médiévale, en nommant deux éléments : la perfection des bienheureux et la justice divine. Cependant, concernant la relation entre les deux, le pape oscille entre deux options : soit la compassion surgit mais se trouve refoulée, soit elle ne naît jamais (section 1). Les théologiens du XIIIe siècle s'accordent fermement à soutenir que les bienheureux ressucités n'ont jamais de compassion envers les méchants en enfer, mais cela avec une divergence : tandis qu'Albert le Grand (et Bonaventure) invoque(nt) l'impassibilité du corps des ressuscités, qui en réprime toutes passions y compris la compassion, l'Aquinate propose la doctrine selon laquelle les passions peuvent surgir suivant le choix rationnel chez les bienheureux, en admettant les passions chez les ressucités et en intégrant dans la discussion l'âme séparée avant la résurrection (section 2). L'argument de Thomas soulève deux questions : comment peut-on réconcilier l'impassibilité des ressuscités et l'existence d'une passion chez eux ? comment peut-on reconnaître à l'âme séparée, dépourvue du corps sensible, une passion, que Thomas défi nit comme mouvement d'une puissance sensible ? Les deux problèmes sont résolus par la fl exibilité ou l'ambiguïté du fondement de la théorie thomasienne des passions : employant l'adverbe proprie pour déterminer la notion propre de passion, l'Aquinate sait en garder diverses acceptions. L'impassibilité des ressuscités n'exclut la passion qu'au sens le plus strict, à savoir l'infl uence négative renversant la domination de la raison sur le corps ; l'âme séparée peut avoir une passion, dans la mesure où la passion au sens large se trouve dans la partie supérieure de l'âme (section 3).
著者
五十嵐 奈央
出版者
『年報 地域文化研究』編集委員会
雑誌
年報地域文化研究 = The Komaba journal of area studies, the University of Tokyo (ISSN:13439103)
巻号頁・発行日
no.18, pp.1-23, 2015-03-31

The poems written by Louis MacNeice in the 1930s often deal with social problems in contemporary England. It can be considered that a loss of individuality was one of the most serious concerns amongst them, with its relation to the rise of Communism. Although a considerable number of intellectuals including young poets and writers in England became communist, it is difficult to categorise MacNeice as belonging to the Left, as he expressed his suspicion about the sustainability of the trend and questioned the communists' idea of subsuming one's individuality in a group ideology. However, it is also true that MacNeice recognised that the individualist's escapism and epicureanism should no longer be possessed by poets. He suggests that individuals choose action with others. In relation to this, what is notable in MacNeice's poems is the various forms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speaker and others. He wrote several poems of a similar nature, in which the speaker mentions the personal experience shared with his lover after hinting of approaching danger. Analysing those poems, it can be seen that the speaker's verbal message for a particular person is aimed at soothing his anxiety about contemporary society. The poem-sequence Autumn Journal (1939) proves this tendency. Particularly notable are the sections in which the poet directly mentions the Munich Agreement – the biggest political upheaval in 1938 – and depicts how a person's private life and the public events were intermingled. It is revealed that the desire for the union with others was based on MacNeice's poetics rather than his political attitude. In his prose essays written in the period, he theorises that poetry itself is a form of "communication" with others, which means that the poet should be a mediator between information and readers. This concept defies the existing view of poetry as something isolated from society. Therefore, the aspects of "communication" in MacNeice's poems in the thirties can be said to reflect his attempt to integrate the poet into society as a whole.